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문단 편집) ==== 러시아&영국&미국 학계 ==== 러시아 역사가들은 아제르바이잔 학살은 1998년 아제르바이잔 전 대통령 [[헤이다르 알리예프]] 가 아르메니아에 대한 아제르바이잔의 피해의식 부각을 위해 아제르바이잔인 학살을 부각시켰다고 비판한다. 즉 혼란스러운 시대상과 정치분쟁으로 인한 여러 학살을 한 데 묶어서 아제르바이잔 학살로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러시아 역사가 빅토르 슈네렐만에 따르면 아제르바이잔 학살은 트랜스 코카서스의 역사를 재작성하기 위한 아제르바이잔의 국가프로그램의 일부라며 비판했다.[[https://ru.wikipedia.org/wiki/%D0%94%D0%B5%D0%BD%D1%8C_%D0%B3%D0%B5%D0%BD%D0%BE%D1%86%D0%B8%D0%B4%D0%B0_%D0%B0%D0%B7%D0%B5%D1%80%D0%B1%D0%B0%D0%B9%D0%B4%D0%B6%D0%B0%D0%BD%D1%86%D0%B5%D0%B2|러시아어 위키백과의 Критика концепции(개념의 비판) 항목 참조.]] 이러한 주장은 굳이 러시아뿐만 아니라 영국이나 미국의 서구권 언론인 및 역사가들에게도 나오는 주장이다. 영국의 언론인 토마스 드 발[* 토마스 드 발은 체첸 전쟁에 대한 비판적 보도로 2006년 러시아에 입국 금지를 당한 적도 있으므로 친러적인 언론인은 아니다.]은 2003년 저서 블랙가든에서 아제르바이잔인들이 국제사회가 20세기에 아제르바이잔인들이 견뎌야 하는 고통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는 완전히 정당화된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1980년대 말 20만의 아제르인들이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추방된 것과 1940년대 5만 명의 아제르인들이 아르메니아에서 추방된 것, 1918~1920년 사이의 피비린내나는 분쟁에서 수천명의 아제르인들이 아르메니아에서 추방된 여러 이질적인 사건들을 한데 묶어서 1998년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바쿠의 3월 사건이 있던 3월 31일로 통합해 아제르바이잔 대량학살의 날로 지정했다고 지적했다. 이는 아르메니아 대학살에 대항해 아제르바이잔에 왜 이런 기념일이 있으면 안되는가? 하는 관점에 시작됐다고 지적하고 있다. 미국 역사가 마이클 스미스(Michael Smith)에 따르면 헤이다르 알리예프 정권 하에서 아제리 대학살이 정권 차원에서 개발되었다고 지적한다. 아제르바이잔 지도부는 아제르바이잔 역사의 비극적인 시기를 대량 학살과 인종 청소라는 서양식 관점으로 해석하는데 이는 엄청난 감정적 부담을 안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아제르바이잔은 자국민의 고통에 대한 납득할 수 있는 사실로, 고통 받는 아르메니아의 "이미지"에 맞서야 한다고 가정한다.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목표가 민족 간의 적대감을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정의를 지키는 것이며, 3 월 31일은 19 세기 초 영토 분쟁의 희생자가 된 약 200만 아제르바이잔인, 아르메니아-무슬림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이클 스미스에 따르면, 아제르바이잔인들은 그들이 저지른 유사한 폭력의 사실을 무시한다.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주장한 대로 19세기 초에 아르메니아인들이 정착한 예레반 일대의 땅이 원래부터 아제르바이잔인들의 고유영토였다는 논리는 아제르바이잔에서만 인정되는 논리로 외국 역사학자들에게는 국가적 차원의 역사 왜곡으로 받아들여진다.[* 아제르바이잔은 집요한 유물 날조와 역사 왜곡으로 아르메니아 영토가 고래부터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살던 땅이라고 주장해 온 바 있다. 관련 학계 사람들에게는 악명 높고 잘 알려진 일인데 아제르바이잔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된 대규모 수백년된 아르메니아 무덤군까지 폭발시키며 당장 역사 좀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그리스, 로마 역사서에도 나오는 말을 뻥이라고 우기면서 아제르바이잔 땅은 한 번도 아르메니아 민족이랑 상관이 없었고 남아 있는 기독교계 유적은 [[https://en.wikipedia.org/wiki/Caucasian_Albania#In_Azerbaijani_historiography|카프카스 알바니아]]라는 소규모 고대 왕국의 것이었다며 우기는 역사 왜곡으로 악명높은 나라다.] 헤이다르는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통계가 여러부분에서 거짓됐다고 주장됐지만 이런 주장은 국제학계에서 반박 받았다. 또 아리프 유누소프 아제르바이잔 평화연구소 소장 겸 역사학자는 소련 시대 이후 아제르바이잔 학교 교과서에서 1990년대 이전에는 아무도 3월 사건들을 "학살"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개정된 교과서에서 아제르바이잔에 대한 구소련의 전체정책이 집단 학살로 묘사됐다고 지적했다. 즉 아르메니아 도적떼 뒤에 러시아가 항상 있었고, 그 후 레닌과 스탈린은 유혈사태를 피하려고 했던 순진하고 인도적인 아제리를 공격했다고 설명한다는 것이다.[* 역사적인 사실을 볼때 레닌은 바쿠 소비에트의 학살을 외교적인 방법으로 풀라고 말렸으며 오히려 스테판 샤후만을 비롯한 바쿠 소비에트가 레닌의 지령을 무시하고 계급 투쟁을 강행했다가 바쿠의 아제리 무슬림들과 충돌해서 학살이 크게 번진 것에 가깝다.[[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186|참고글]]] 이 학살이라는 용어를 정당화하기 위해 교과서의 저자들은 20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인들에게 이 용어를 귀속시켰다. 실제로 헤이다르 알리예프는 1978년 스테판 샤후먄을 칭송하고 바쿠에서의 3월 사건을 볼셰비키가 취한 단호하고 확고한 조치 때문에 청산된 무사바트(평등당)들이 저지른 반소련 반란으로 평가한적이 있다. 또 아제르 학살을 [[홀로코스트]]와 연관시켜 유대인 대학살과 연계해 이스라엘과의 동맹을 추구해서 아르메니아 대학살과 맞서 싸울려는 정치-외교적 도구로 이용할려고 한 점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